THE PIANO :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I
최종 수정일: 8월 28일
전주곡 Prelude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모습을 떠올려봅니다.건반 앞에 앉아 조용히 집중한 채, 두 손은 건반 위를 세심하게 오갑니다. 무대 조명 아래 피아노 안쪽에서는 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페달을 밟을 때마다 가지런히 늘어선 해머가 작은 파도처럼 오르내립니다.
하지만 피아노에는 연주자의 손 아래 놓인 건반보다 훨씬 많은 것이 숨어 있습니다. 피아노 한 대는 스모 선수보다 무겁지만, 작은 박새 한 마리의 무게에도 반응할 만큼 섬세합니다. 그 안에서는 수천 개의 부품이 촘촘하게 맞물려 움직입니다. 오래된 시계처럼, 어쩌면 하나의 천문기구처럼, 작은 움직임 하나가 수많은 다른 움직임을 불러오지요. 여기에는 묘한 역설이 있습니다.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이, 본질적으로는 지극히 정교한 기계장치에서 태어난다는 것.
그렇다면 피아니스트의 손끝과 우리의 귀 사이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어쩌면 그보다 더 단순한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피아노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피아노는 반드시 건반으로만 연주해야 할까요?
첼로를 연주하듯 손가락으로 직접 현을 뜯거나 문지르면 어떤 소리가 날까요?
한 건반을 소리 없이 누른 채 다른 음을 연주하면, 숨겨져있던 새로운 소리가 깨어날 수도 있을까요?
피아노 안에 작은 물체 하나를 넣는다면요? 피아노의 목소리는 어디까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시도를 피아노 확장주법(Extended Piano Techniques)이라고 부릅니다. 건반을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거나 현을 직접 만지는 것, 공명을 이용하거나 악기 안에 물체를 넣는 것, 때로는 연주자의 목소리를 음악의 일부로 사용하는 것까지 폭넓게 포함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법을 단순히 ‘특이한 소리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이해하기엔 아쉬운점이 있습니다.
피아노 확장주법은 완전히 새로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 피아노에 숨어 있던 소리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일에 더 가깝습니다. 그 과정에서 피아노라는 악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현은 어떻게 울리고, 하나의 음은 다른 현과 어떻게 공명하며, 건반 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평소에는 지나치기 쉬운 여러 음색을 발견하게 되고, 연주자 역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더 구체적으로 상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잠시 건반에서 손을 떼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우리가 아는 피아노가 아직 세상에 없던 때로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
피아노의 역사는 새로운 악기 하나가 만들어진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이미 존재하는 악기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조금씩 발견해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700년 무렵, 이탈리아의 악기 제작자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Bartolomeo Cristofori)는 메디치 가문의 궁정에서 악기를 만들고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만든 악기 가운데 하나가 오늘날 최초의 피아노로 여겨집니다.
당시 건반악기의 중심에는 하프시코드가 있었습니다. 밝고 선명한 소리를 내는 악기였지만, 작은 플렉트럼으로 현을 뜯는 구조 때문에 손끝의 힘으로 한 음 한 음의 크기를 조절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크리스토포리는 현을 뜯는 대신 두드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가죽으로 감싼 작은 해머가 건반의 움직임에 따라 현을 때리도록 한 것이지요.
치터와 산투르를 떠올리면 그 차이를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치터는 현을 뜯어 소리를 내지만, 해머드 덜시머의 일종인 산투르는 가벼운 나무채로 현을 두드립니다.


이 작은 차이는 건반과 손끝의 관계를 바꾸어놓았습니다. 해머가 현을 때리는 힘이 연주자의 터치에 따라 달라지면서, 한 음을 여리게도 강하게도 연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악기에는 처음에 gravicembalo col piano e forte(그라비쳄발로 콜 피아노 에 포르테), 대략 ‘여리고 강하게 연주할 수 있는 건반악기’라는 긴 이름이 붙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이름에서 한 단어만 남았습니다.
「피아노.」
점점 커지는 피아노
크리스토포리의 발명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그 후 200여 년 동안 피아노는 계속 변했습니다. 작곡가가 새로운 소리를 원하면 제작자는 악기를 고쳤고, 달라진 악기는 다시 작곡가의 상상력을 넓혔습니다.
모차르트 시대의 피아노, 오늘날 흔히 포르테피아노라고 부르는 악기는 대체로 다섯 옥타브 정도의 음역을 지녔습니다. 가벼운 빈식 액션과 가죽 해머, 나무 프레임을 지닌 당시의 피아노는 맑고 투명하게 울렸고, 소리도 비교적 빨리 사라졌습니다.
오늘날의 피아노와 비교하면 음역도 좁고 울림도 짧았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음악가들에게 그것은 단순한 한계만은 아니었습니다. 가벼운 터치와 섬세한 아티큘레이션, 빠르게 변하는 음색은 그 악기만의 음악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노에는 또 다른 요구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베토벤 시대에 이르러 피아노에는 더 큰 음량과 넓은 음역, 한층 폭넓은 다이내믹이 요구되기 시작했습니다. 악기 제작자들은 나무 프레임을 보강하고 건반의 음역을 여섯 옥타브 이상으로 넓혀갔습니다. 무릎으로 조작하던 장치 역시 점차 오늘날과 같은 발 페달로 바뀌어갔습니다.
베토벤 역시 당시 새롭게 등장하던 피아노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가 접한 여러 제작자의 악기 가운데 하나가 영국 브로드우드(Broadwood)의 피아노였습니다. 이전보다 넓어진 음역과 강한 울림을 지닌 악기들은 베토벤이 후기 작품을 쓰던 시기에도 계속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도 피아노의 변화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연주회장은 점점 커졌고, 악기에는 더 풍부한 음량과 긴 지속음, 다양한 음색이 요구되었습니다.
색채와 깊이, 그리고 공명.

19세기에 들어 피아노의 구조는 더욱 크게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속을 이용해 프레임을 보강하면서 현에 더 높은 장력을 견딜 수 있게 되었고, 피아노의 음량과 지속음도 점차 커졌습니다. 가죽을 사용하던 해머에는 펠트가 쓰이기 시작했고, 음색 역시 달라졌습니다.
쇼팽이 활동하던 시대의 피아노는 바로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즐겨 연주했던 플레옐의 피아노는 오늘날의 콘서트 그랜드와는 또 다른 섬세한 음색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쇼팽은 페달과 터치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해 긴 선율과 여러 겹의 음색을 만들어냈습니다.
피아노의 구조는 이후에도 계속 변했습니다.
그중 오늘날의 그랜드피아노 모습을 만드는 데 중요한 변화 하나가 교차현 방식(overstringing 또는 cross-stringing)입니다. 저음현을 다른 현들과 평행하게 놓는 대신, 중음역의 현 위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도록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악기의 크기를 크게 늘리지 않고도 더 긴 저음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저음은 더욱 깊고 풍부해지고, 서로 다른 음역 사이의 음색도 이전보다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리스트에게 피아노는 때로 한 대의 오케스트라와도 같았습니다. 넓어진 음역과 강한 저음, 풍부해진 공명은 건반 위에서 오케스트라의 힘과 색채를 상상할 수 있게 했습니다. 리스트의 연주와 작품은 다시 피아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했습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88개의 건반을 갖춘 피아노가 등장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랜드피아노의 모습도 점차 갖추어집니다.
그렇게 200년 가까이 피아노는 더 넓게, 더 크게, 더 오래 울리는 방향으로 변해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몇몇 작곡가들은 조금 다른 곳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피아노라는 이름에는 처음부터 두 개의 소리가 함께 있었습니다. Piano와 Forte.
오랫동안 악기는 더 큰 forte를 향해 발전해왔습니다. 그렇다면 반대편에는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요?
더 크고 강한 소리가 아니라, 이미 이 악기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들어보지 못한 소리들.
이제 질문이 달라집니다.
이 피아노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질문

20세기 초, 헨리 카웰(Henry Cowell)은 피아노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건반을 손바닥이나 주먹, 팔뚝으로 한꺼번에 누르는 톤 클러스터(tone cluster)를 사용했고, 때로는 건반에서 손을 떼어 피아노 안쪽으로 가져갔습니다. 현을 직접 뜯고, 두드리고, 쓸어 연주하는 이른바 스트링 피아노(string piano)의 세계였습니다.
Aeolian Harp에서는 한 손으로 몇 개의 건반을 소리 없이 누른 채, 다른 손으로 피아노 안의 현을 부드럽게 쓸어냅니다. 해머는 현을 때리지 않습니다. 대신 손끝에서 시작된 진동과 열린 현들의 공명이 어우러져 건반만으로는 만나기 어려운 음색을 만들어냅니다.
이후 존 케이지(John Cage)는 또 다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현 사이에 나사와 볼트, 고무 같은 물체를 넣자 익숙한 피아노 소리는 전혀 다른 음색으로 바뀌었습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입니다.
조지 크럼(George Crumb)의 음악에서는 피아니스트의 역할이 더욱 넓어집니다. 건반을 연주하다가 피아노 안의 현을 직접 만지고, 때로는 노래하거나 속삭입니다. 연주자의 목소리와 몸짓까지 피아노의 소리와 함께 작품을 이루기도 합니다.
이후 피아노 안쪽을 연주하고, 물체를 사용하고, 공명을 이끌어내고, 목소리와 몸을 음악에 참여시키는 방법은 수많은 작곡가와 연주자에게 이어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피아노 확장주법(Extended Piano Techniques)이라고 부르는 넓은 영역도 그렇게 만들어져 왔습니다.
피아노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건반도, 현도, 향판도, 커다란 몸체도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은 어쩌면 우리가 이 악기에서 무엇을 찾고, 어떻게 손을 내미는가일지도 모릅니다.
건반을 넘어

오늘날의 피아노는 300여 년 전 크리스토포리가 만들었던 악기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건반의 수가 늘고, 프레임과 현이 달라지고, 해머와 페달도 변했습니다.
그 변화는 악기의 바깥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곡가와 연주자들은 건반에서 손을 떼어 현을 만지고, 공명을 찾아내고, 때로는 피아노 안에 낯선 물체를 넣었습니다.
어쩌면 여기서 ‘확장(extended)’되는 것은 피아노 자체보다, 피아노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우리의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잠시 피아노를 처음 보는 사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커다란 검은 몸체와 세 개의 다리. 한쪽에는 흰색과 검은색 건반이 가지런히 놓여 있습니다. 우리가 손으로 만지는 것은 대부분 이 건반뿐입니다. 하지만 뚜껑을 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납니다. 팽팽하게 당겨진 수많은 현과 해머, 댐퍼, 금속 프레임, 그리고 그 아래 숨어 있는 넓은 향판.
건반 하나를 누르면 이 안에서 작은 움직임들이 연달아 시작됩니다. 해머가 현을 때리는 것은 그중 한순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건반과 우리가 듣는 한 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다음 글에서는 건반 하나를 눌러놓고, 그 움직임을 피아노 안쪽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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